출처: 우리 궁궐 이야기 2009.10.08.
우리 궁궐 이야기(옮긴글)
1. 궁궐 나누기
① 법궁(法宮) : 국왕이 사는 공식 궁궐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궁궐 → 경복궁
② 이궁(離宮) : 화재가 나거나 궁궐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겼을 때, 혹은 왕이 스스로 옮기고 싶을 때
기거할 목적으로 지은 궁 → 창덕궁, 창경궁
③ 양궐(兩闕)체제 : 조선 왕조 국왕들은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을 유지하면서, 두 궁궐을 오가며 지
냈다. 이러한 조선 왕조의 궁궐 경영 내지 이용 방식을 양궐 체제라고 한다.
2. 궁궐에는 어떤 건물이 있을까?
→ 크게 내전, 외전, 동궁, 생활 주거 공간, 궐내각사로 구성
① 내전(內殿) :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과 일상적인 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궁궐의 핵을 이루는 곳.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
② 대전(大殿) : 왕의 기거 공간(연거지소)과 왕이 주요 신료들을 만나 공식적인 회의를 여는 건물(편전)
로 구성
③ 중궁전(中宮殿) :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
④ 외전(外殿) :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 의식, 연회 등 행사를 치르는 공간.
⑤ 동궁(東宮) :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 공간
⑥ 궐내각사(闕內各司) : 궁궐안에 설치된 관서들. 곧 궁궐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여러 층의 관리들의 활
동 공간 (내시들의 공간, 음식 담당하는 곳, 약방, 홍문관, 승정원, 규장각 등)
3. 방위를 따질 때?
기준은 왕이다. 왕은 항상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잡게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은 남, 후는 북, 좌는 동, 우는 서가 된다.
→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로 배치
→ 동/서/남/북/중앙도 순서에 따라 인, 의, 예, 지, 신으로 배치
4. 공포(拱包)는 왜 만들었을까?
집의 규모가 커지면 자연히 지붕의 크기도 커지는데 큰 지붕을 기둥 끝에 바로 얹으면 전체적으로 집이 너무 낮아 겉으로 보기에도 답답하고 안에는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해진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고자 기둥과 도리 사이를 띄어서 지붕을 높이기 위해 짜넣은 구성물을 공포라 한다.
5. 건물에도 신분은 있는가?
→ 전-당-합-각-제-헌-루-정 (殿-堂-閤-閣-齊-軒-樓-亭)
① 전 : 건물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
왕, 왕비,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사는 건물. 주로 공적인 활동
② 당 : 전에 비해 격이 한 단계 낮은 건물. 일상적 활동 공간
③ 합, 각 : 전이나 당의 부속 건물
④ 제, 헌 :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 활동 공간
⑤ 루 : 바닥이 지면에서 사람 한길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 있는 집. 이층 건물일 때 일층은 각, 이층은 루가 붙는다
⑥ 정 : 흔히 정자라고 하는 것으로 연못이나 개울가에 있어 휴식이나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집
6. 궁궐 정문에 해태상이 있는 이유는?
해태는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상상 속의 동물로, 옳지 못한 행동이나 나쁜 주장을 하는 자를 무는 성질이 있어, 궁궐로 들어가는 관원들에게 행동을 바르게 하고, 말을 옳게 하도록 무언의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태가 상징하는 핵심이다.
7. 광화문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까닭은?
일제는 1926년 광화문을 해체하여 궁궐 동북쪽으로 옮겨버렸다. 그나마 6.25로 파괴당하여 석축만 남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글씨는 당시 대통령이 친필로 편액을 써 걸었는데, ‘門化光’이 아니라 ‘광화문’이다
8. 궁궐 내의 잔디와 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고유의 조경법에서는 사람 사는 집의 울 안에는 잔디를 심지 않았다. 그렇다면 궁궐에도 잔디밭은 가당치 않은 것이요, 그 잔디는 궁궐에 가득 들어찼던 수많은 건물들이 일제에 의해 헐리고 없어진 자리로 보면 된다. 또 불교 국가의 궁궐이라면 몰라도 유교를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궁궐 경복궁에 탑, 부도, 불상 등이 있었을 리가 없다.
9. 경복궁 들어가기
1) 조정(朝庭)
조회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적 의식 행사를 치르던 경복궁의 정전이 근정전이다. 근정전의 앞 마당,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평평한 돌(박석)이 깔린 그곳이 바로 조정이다
2) 삼도(三道)
길이 세 구역으로 나뉘었는데(三道) 그 가운데 부분은 양 옆보다 조금 높다. 왕만 다니게 되는 어도(御道)이다.
3) 품계석(品階石)
조정에 참여하는 관원들은 각자 자기 관품에 해당하는 위치에 가서 서라는 용도로 만든 돌. 삼도의 동편에 서는 관원을 동반(문반), 서편에 서는 관원들을 서반(무반)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쳐 양반이라고 불리웠다.
4) 조정의 박석에 박힌 동그란 쇠고리
관원들이 조정에 모여 있을때는 햇살이나 빗발을 가려줄 차일을 쳤는데 이 고리는 그 차일 치는 줄을 매던 것이다.
5) 근정전 기단에 새겨진 돌짐승들
→ 사신(四神) - 청룡, 현무, 주작, 현무
→ 십이지신(十二支神) -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6) 근정전 내부
임금이 앉는 의자(용상)와 세면짜리 나무 병풍(삼곡병), 그 뒤로 다섯 봉우리가 뾰족뾰족 솟아있으며, 그 위로 해와 달이 떠 있는 그림을 그린 병풍(일월오봉병)이 있다. 특히 천장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쌍룡희주(발가락이 일곱 개라 하여 칠조룡이라고도 함)가 그려져 있다.
7) 정(鼎)과 드므(드므:높이
향로로 알기 쉬운데 향이란 사당이나 신전 등, 신이나 혼령을 위로하는 곳에 피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정전이 사당이나 신전인가? 설령 향로라 해도 무슨 향로가 건물 밖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정(鼎)이다. 정이란 왕을 상징하는 징표이다.
큰 독은 ‘드므’라는 것으로 하늘의 화마(불마귀)가 그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제풀에 놀라 달아나라는 뜻이라 한다. 말하자면 주술적 소방용구이다
8) 경회루의 불가사리
옛날부터 불을 잡아먹는 불가사리란 짐승이 살았다고 한다. 얼른 보면 코끼리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코끼리와는 다른 여러가지 신격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다. 목조 건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재인바, 경회루의 돌난간에 이 불가사리를 세워 불길의 접근을 막았다. 6.25때 포탄파편이 난비한 중에서도 경회루가 무사하였음은 불가사리 덕일까? 불가사리는 파편에 맞아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가 있다.
9) 잡상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 있는데 장식 효과와 함께 잡귀들이 이 건물에 침입하는 것을 막는 벽사(주술)의 의미가 있다.
10) 왕과 왕비의 침전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을 따로 만들어 남북축 선상에 앞뒤로 배치하였다.
왕의 침전은 대침인 강녕전과 소침인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응지당 등 다섯 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연생전과 경성전은 강녕전의 앞쪽에 동서 대칭으로, 건물의 전면이 동서쪽으로 마주보도록 배치되었다. 이와 달리 연길당과 응지당은 남향한 채 강년전 배후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었는데, 두 건물의 앞퇴칸은 강녕전의 뒤퇴칸과 복도로 연결 되어있다. 그런데 『강녕전진찬도』(1867)나 『진찬의궤도』(1897)의 『강년전도』에 의하면 연생전과 경성전의 뒤퇴칸도 강녕전의 앞퇴칸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침의 중정은 강녕전 앞 월대를 중심으로 네 채의 소침이 둘러싸는 한편 남행각, 동행각, 서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강녕전 뒤는 교태전의 남행각으로 연길당 뒤는 인지당의 남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 흠격각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응지당 앞퇴칸에 붙인 것으로 보아 흠경각이 지극히 내밀한 위치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왕의 침전은 대침, 대전 등으로도 부르며 이를 모시는 환관들의 거처를 대전장방이라고 한다. 창건 초기에는 연생전과 경성전만이 강년전을 보좌하는 삼전 형식이었으나 고종 때에 와서 연길당과 응지당이 추가되어 오전 형식을 변모하였다. 그리하여 천문의 오제좌를 상징하기도 하고, 우주 만물의 기본 구성 요소인 오행을 뜻하게도 되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앞에는 앞퇴칸 좌우에 이어 지은 곁채와 동행각, 서행각과 남행각을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중정이 있다. 정전과 편전이 접속된 부분에서 폭을 감소시킨 동서행각은 다시 강녕전 일곽과 교태전 일곽이 접속된 부분에서 폭이 크게 감소되어 있다. 이러한 행각 폭의 감소는 각 영역으 중정 크기에도 반영되어, 공적인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영역과 왕실의 사적이 거주 지역을 적절하게 나눈다.
교태전 후방에는 경회루 터에서 파낸 흙을 쌓아 만든 가산, 곧 아미산이 있는데 자연의 풍요로움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왕비의 침전은 중전 혹은 중궁전이라 불리는데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잉태되는 산실이기에 왕조 사회의 근본을 출발시키는 장소라 하여 교태나 양의 등의 이름을 붙였다.
한편 교태전 바로 서편에 지어진 함원전은 교태전을 보좌하는 소침전을 보인다. 침전 구역은 1차 복원 계획의 대상으로 이미 준공되어 1996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11) 동궁
동궁은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의 궁전을 가리키는 말로서 세자에 대한 경칭으로도 쓰인다.
동궁은 세자를 제왕으로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모두 갖추도록 설계되었으니 세자와 세자빈의 처소, 세자궁에 딸린 내관들의 처소, 세자가 신하들부터 조회를 받는 곳이다.
또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서연이나 시강 등의 강학을 받으며 세자를 위한 책고와 세자를 호의하는 곳 등이다. 이러한 시설은 각각 정궁의 연조, 치조, 외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도 이러한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동궁의 시설은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곧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동궁이 없었으며, 창건 직후에 태조가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을 때에도 동궁이라 부를 만한 건물을 딸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미 태조 1년(1392) 7월 관제를 새로 제정할 때에 세자 관속을 두어 강학과 시위 등의 일을 맡게 한 사실, 태종 18넌(1418) 6월에 세자익위사를 따로 설치하여 세자 관속을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로 분설한 사실 등으로 보면 이미 동궁이 건립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록으로는 경복궁에 동궁이 처음 마련된 것이 세종 9년이다. 세종은 재위 기간 대부분을 경복궁에서 보내면서 법궁 체재를 완비하였으며 이런 과정에서 동궁을 제도화할 필요를 절감하고, 9년에 경복궁 정전의 동쪽 넓은 자리에 서연과 시강을 받는 장소인 자선당을 창건하였다. 또 세종 25년에는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을 장소로 계조당을 창건하여 이때부터 내당인 자선당과 정당인 계조당으로 구성되었다.
계조당은 세종이 세자에게 섭정을 시키기 위해 창건한 시설이었으므로 단종 즉위 후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계조당과 승화당을 헐었고 이후 세조 7년 11월에는 수리도감을 설치하여 경복궁을 크게 개수하면서 세조 8년 12월 동궁의 자리를 옮겨 궁성 서북쪽 간의대 남쪽에 새로 지었으며, 성종 17년에는 창덕궁 안에 동궁을 창건하였다.
이런 가운데 중종 38년 때의 화재로 자선당 일대가 모두 불타버리고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한 동궁수리도감이 설치되어 재목과 기와까지 마련하였으나 명종 5년 이후에 인수궁 건립과 종묘 보수에 사용해 버린다. 그 뒤 명종 8년 다시 큰불이나 소실된 경복궁 대내를 다음해에 중건할 때 동궁도 함께 중건하였다. 고종 때 중건된 동궁 일곽은 북으로는 편전 우측의 자선당에서 남으로는 동십자각 이북과 운방과 계방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중건 계획에서 아주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자선당과 비현각 일곽, 계조당 일곽, 장방과 소주방 그리고 별감방 일곽, 계조당 일곽, 동남쪽 궁장 옆 춘방과 계방 일곽, 춘방 책고와 별군직청 일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설은 각각 정궁의 연조, 치조, 외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2) 자경전
자전은 왕의 모친이자 선왕의 비(妃)로 선황 사후에 대비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한편 대비의 처소 곧 대비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복궁 중건을 시작한 1865년에는 대왕대비인 익종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왕대비인 헌종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대비인 철종비 철인왕후(哲仁王后) 등 세 분의 대비가 생존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왕대비(속칭 趙大妃)가 경복궁 자경전에 머무르며 1866년까지 수렴청정을 한 사실은 유명하다. 조대비는 1890년에 아미산 뒤쪽의 한 내전인 흥복전에서 승하하였으므로 흥복전도 자전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자경전 뒤편 깊숙이 자라잡은 만경전도 후궁 일곽에서는 만화당과 함께 가장 규모가 큰 거물로 넓이가 36칸이고, 전(殿)인 점으로 보아 대비전으로 헌종 계비 효정왕후의 거처였으리라 짐작된다. 만경전 오른편의 건복합(建福閤)과 뒤편의 만화당, 통화당(通和堂) 등은 만경전을 보좌하는 건물인 듯하다.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고도 불리는데, <주례고공기>의 삼조가 왕을 중심으로 한 궁궐의 기본 형식 구조임에 대하여 그 동쪽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의 거처를 따로 마련한 데서 생겨난 듯하다. 자경전이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 동쪽에 자리잡은 것, 성종 때 세 대비를 위하여 창경궁을 창덕궁의 동쪽에 따로 마련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비의 거처가 반드시 궐내 동쪽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현종 때에는 창덕궁에 만수전(萬壽殿)과 집상전(集詳殿)을 인정전의 서쪽과 동쪽에 각각 건립하였는데 이는 장락궁(長樂宮)을 참조한 중국 한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한편 왕위의 계승이 선위(禪位) 형식으로 이루어지면 선왕은 상왕(上王)이라고 불리며 정궁 밖에 떠로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때 상왕비의 거처가 상왕의 궁전에 있게 됨은 물론이다.
13) 향원정
향원정은 왕실 전용의 휴식공간이었다. 경회루가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매우 여성적이다. 향원정의 모습도 역시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지만 끝 모서리가 둥근 부드러운 사각형이다. 예로부터 우리들의 연못은 이처럼 네모로 하고 그 안의 섬은 둥근 형태를 띄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져 있다는 동양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향원정도 연못 한 가운데 네모난 섬을 두었다. 그리고 그 섬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향원정이라고 지었다.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이다.
정자는 둥근 섬 한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낮게 세운 다음 2층의 누각식으로 꾸민 것이다. 1층에는 평범한 난간의 툇마루를 두었고, 2층에는 닭다리 모양의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각 칸마다 예쁜 나무 창살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을 올라가서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하였다.
향원정은 취로정이라 불리던 정자를 1873년 건청궁을 지을 때 다시 손을 본 것이다. 또한 향원정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를 취향교라 하는데 이도 지금과 달리 건청궁이 있었던 북쪽으로 나 있었던 것이다. 이 취향교는 6,25전란으로 불타 없어졌고 지금의 남쪽으로 난 다리는 1953년에 만든 것이다. 건청궁이 없으니 그쪽으로 놓기보다는 편의를 위하여 남으로 놓은 것이다.
출처 여산 글올린이 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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